장조(사도세자)의 융릉
1789년(정조 13년) 10월 16일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를 영우원에서 현륭원(현 융릉)으로 옮기면서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는 호가 고산(孤山)인데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無學)’이라고 부른다. 감여(堪輿)의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神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극찬을 하였다.
원래 이 능자리는 효종의 능자리로 고산 윤선도가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깊어서 효종이 승하하자 나라에서는 간산을 위하여 고산공을 불렀다. 간산에 참여하여 마침내 좋은 묫자리를 선정하고 토목공사까지 하였으나 송시열 등의 반대로 결국 사용하지 못하다가 정조에 의하여 재조명되어 결국 장조의 능자리가 되었다.
산릉의 기해년(山陵議 己亥 1659, 현종 즉위년)
효종의 능자리를 간산한 기록이다.
水原戶長家後山
臣謹審此山龍穴砂水盡善盡美。而無少欠缺。眞大風水。誠千里所無。千載一遇之地也。表裏周匝吉格則諸術官皆能備陳。臣不必重複詳達矣。大槩其龍局亞於 英陵龍局。朱子所謂宗廟血食久遠之計。亶在於此矣。
水原鄕校基。在此垣局之內。亦似成就。而不可與戶長家後山比論矣。戶長家後山越邊。又新得一穴。此亦同在一局之內。而四獸合法。比之於戶長家後山。則高下雖懸。其亦可用之處也。
수원 호장 집의 뒷산〔水原戶長家後山〕현 융릉자리
신이 삼가 이 산을 살펴보건대, 용혈사수(龍穴砂水)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아름다워 조그마한 결함도 없으니, 참으로 대단한 길지로서 그야말로 천 리 이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천재일우의 땅입니다. 안팎과 주변이 모두 길격(吉格)인 것에 대해서는, 여러 술관(術官)들이 모두 구체적으로 진달할 수 있을 것이니, 신이 꼭 중복해서 상세히 진달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대개 그 용의 국세〔龍局〕가 영릉(英陵)의 그것에 버금가는 만큼, 주자(朱子)가 말한 ‘종묘(宗廟)의 혈식(血食)이 길이 이어지게 하는 계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원(水原) 향교(鄕校)의 터도 이 원국(垣局) 안에 있으면서 혈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호장(戶長) 집의 뒷산과 견주어 논할 수는 없습니다. 호장 집 뒷산의 건너편에서 또 새로 하나의 혈(穴)을 얻었는데, 여기도 똑같이 하나의 원국 안에 있고 사수(四獸 청룡, 백호, 주작, 현무)도 법도에 합치됩니다. 호장 집의 뒷산에 비교하면 고하(高下)가 현격하긴 합니다만, 여기도 쓸 수 있는 곳입니다.
(과천(果川)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묘산(墓山), 광주(廣州) 안여경(安汝敬)의 묘산, 헌릉(獻陵) 이수동(梨樹洞)의 터, 영릉(英陵) 홍제동(弘濟洞)의 터 등 이상 네 곳의 산론(山論)은 초고(草稿)가 전하지 않는다.)
김영렬의 묘산〔金英烈墓山〕
평평한 지맥(支脈)의 용이 멀리서부터 내려와 매우 유순(柔順)해져서 강을 굽어보는 큰 들판에 구불구불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마치 등나무 덩굴이 서로 얽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산과 하나의 물이 정답게 감싸는 곳마다 모두 혈(穴)을 짓고 있으니, 참으로 예로부터 마디마디가 옥(玉)의 땅이라고 말해지는 곳인데, 김영렬(金英烈)의 산소도 바로 여러 군데 맺혀 있는 혈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혈이 많이 맺혀 있기 때문에 단연 뛰어나게 특이한 하나의 혈이 없으니, 국가의 능침(陵寢)의 큰 용도를 논의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윤반의 묘산〔尹磻墓山〕
용혈사수(龍穴砂水)가 좋다고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하니, 참으로 쉽게 얻지 못할 길지(吉地)입니다. 그러나 당초 대룡(大龍)이 크게 혈을 맺은 곳이 아니라서, 능침의 후보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게다가 이곳은 세조대왕(世祖大王)의 국구(國舅)의 장지(葬地)입니다. 간산(看山)하러 가는 일행이 그 산에 들어가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하니, 감히 그 가부(可否)를 논하지 못합니다.
광주 속달의 동래군 묘산〔廣州束達東萊君墓山〕
산세가 힘차면서 약동을 하며 뭇 산들이 폭주(輻輳)하여 에워싸고 있으니, 길지라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명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내수구(內水口)가 조여지지 않아서 2천 보(步)쯤의 거리까지 물길이 보이니, 완전무결한 국세(局勢)는 못 되는 듯싶습니다. 그리고 비록 길지라고 말은 하지만, 하나의 산줄기 위에 장사 지낸 분묘가 무려 17기(基)에 달합니다. 200여 년 동안 대대로 큰 벼슬아치를 배출하다 보니 지기(地氣)가 새어 나간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남아 있는 것은 얼마 없을 듯합니다.
남양 홍 정승의 묘소와 홍기영의 족장〔南陽洪政丞墓所洪耆英族葬〕
용세(龍勢 산세(山勢))가 멀리서부터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서 구불구불 내려오는 가운데, 소조(小祖)의 산(山)이 존경스럽게 우뚝 서 있고, 똬리를 튼 국세가 견고하고 주밀하며, 조안(朝案)이 정답게 바라다보이니, 이곳이 길지임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홍 정승과 홍기영의 양묘(兩墓)가 모두 같은 국(局) 안에 있으면서 단지 한 겹의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또 홍기영의 묘소와 같은 맥(脈)의 약간 위에 홍섬(洪暹)의 묘소가 있으니, 이는 곧 홍기영의 아비로서 역시 정승(政丞)을 지냈습니다. 등록(謄錄)에서 말하는 홍 정승은 바로 홍언필(洪彥弼)이니, 이 사람은 홍섬의 아비입니다. 그리고 홍언필의 묘소와 같은 능선의 조금 아래에 있는 하나의 묘에는 그 비갈(碑碣)에 홍 동지(洪同知)라고 적혀 있는데, 묘소 아래의 사람들은 그 이름은 말하지 못하고 단지 홍언필의 부친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묘소는 바로 홍씨(洪氏)의 성(姓)이 이 산에서 발복(發福)한 시조(始祖)의 무덤으로, 대대로 고위 관원을 배출한 것이 100여 년을 밑돌지 않는다고 사료되니, 이곳은 정기(精氣)가 비축되어 있는 완전한 땅은 못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백발의 노파에게서 후사(後嗣)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옛사람이 깊이 경계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런 곳을 국가 능침(陵寢)의 후보지로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낙생역의 이증 묘소〔樂生驛李增墓〕
순한 용이요 순한 사격(砂格)으로서, 국(局)을 빌려다 쓰면서 조금 혈(穴)을 맺었을 뿐이라서 눈길을 줄 만하지 않으니, 어찌 감히 국가의 용도를 의논하겠습니까. 그저 주전(廚傳)만 허비할 따름이니, 이런 곳이 등록(謄錄)에 기재되어 있다니 괴이할 뿐입니다.
양재의 새로 천거하는 산〔良才新薦山〕
원국이 에워싸 보듬고 있으면서 산세가 지극히 유순한데, 높은 곳에 자리를 잡으면 공중에 떠서 노출되고, 낮은 곳에 자리를 잡으면 우묵해서 움집처럼 됩니다. 혈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국가의 용도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벌아치산(伐兒峙山)
남산(南山)이 끝나려 하는 부위에서 몸을 뒤집어 형세를 역전시키며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의 형국을 이루었는데 하수(下手)에 힘이 들어 있습니다. 안산(案山)과 역수(逆水)가 활처럼 감싸고 있으며, 바깥의 조산(朝山)도 정답게 바라다보이니, 완연히 하나의 길지(吉地)가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대세(大勢)를 가지고 논하건대, 이곳은 산의 배후(背後)에 해당하는 데다가, 여기(餘氣)가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명당(明堂)이 반듯하지 않으며, 용맥(龍脈) 중에 골짜기를 지나는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니, 옛사람이 말한 병든 용이 아닌가 의심되므로 성주(聖主)의 의관(衣冠)을 모실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을 듯합니다.
왕십리의 산〔王十里山〕
원국(垣局)이 잘 둘러 있고 조산과 안산이 구비되어 있어 완연히 혈(穴)을 이룬 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혈과 가까운 곳의 능선에 퇴사(退卸 변화)가 없어서 그 능선의 형태가 완둔(頑鈍)하며 순욕(唇褥 혈 앞의 봉긋 솟은 부분)이 단정하지 못하니, 쓸 만한 곳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건원릉 안에서 새로 얻은 산〔健元陵內新得山〕
신이 삼가 구(舊)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의 우측 두 번째 언덕을 간심(看審)해 보건대, 용세(龍勢)가 서너 번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며 기상(氣象)이 매우 유순하였고, 안산(案山)이 정답게 수구산(水口山)과 합금(合襟)하였으며, 바깥의 조산(朝山)도 수려하였습니다. 이런 점은 좋았습니다마는, 혈도(穴道)가 급한 듯하고 혈(穴)이 있는 곳에 골바람이 비껴 불어오는 것이 흠이었습니다.
구(舊) 목릉의 좌측 첫 번째 언덕은 일찍이 장중귀인(帳中貴人)이라고 말해지던 곳인데, 귀인(貴人)이 아니라 바로 돈금(頓金)이었습니다. 그러나 용맥(龍脈)의 형세는 서너 차례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였지만, 단지 기상이 유순한 점에 있어서는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중에도 혈도는 평탄하고 혈에 임한 곳은 굽은 듯하였는데, 수구(水口)가 합금하지 못해 텅 비어 있는 공간이 꽤나 컸고, 바깥 조산의 수려함도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 언덕의 흠이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혈도가 평탄하고 혈에 해당하는 곳에 움푹 팬 곳이 없는 것으로 본다면,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비해서 조금 나을 듯합니다.
대개 두 개의 혈(穴) 모두에 미진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대개 건원릉(健元陵 조선 태조의 능) 국내(局內)의 남은 기운이 맺힌 것일 뿐이요, 온전한 기운이 혼융하게 이루어진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흠결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논해 보건대, 모두 쓸 수 있는 혈이긴 합니다만, 양쪽 모두 완전히 구비된 아름다운 곳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혈(穴)과 수원(水原)의 산의 우열을 정하는 일은, 신(臣)이 당초에 수원의 산을 논할 적에 소견을 망녕되게 진달하였으니, 지금 감히 재차 그르칠 수 없기에 뭐라고 진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건원릉 좌측의 첫 번째 언덕〔健元陵左一岡〕
신이 일찍이 주자(朱子)의 말을 들어 보건대, 선조의 무덤 근방에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선조의 영혼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간심(看審)한 건원릉의 첫 번째 언덕은, 건원릉의 입장에서 말하면 청룡(靑龍)에 해당하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60보쯤 되고, 목릉(穆陵)의 입장에서 말하면 백호(白虎)에 해당하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40보쯤 됩니다. 그렇다면 미안(未安)할 뿐만이 아니고, 청룡과 백호의 땅을 파서 상하게 할 경우, 선왕(先王)의 능침에 해가 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선왕의 능침에 해가 되는 점이 있다면, 용맥(龍脈)이나 혈도가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나 길한지의 여부는 논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