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대 활약했던 근기남인계 문인화가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린 <일본여도(日本輿圖)>(보물 제481-4호)는 해남윤씨의 어초은공파 종가인 전라남도 해남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여도>는 커다란 크기의 종이 한 장을 이용하여 일본 국토 전체를 대상으로 그린 전도로서 책자 크기만 하게 접은 절본(折本)형식으로 되어 있다. 표지의 앞면에 “日本輿圖”라는 표제가 적혀있고, 표지의 바탕에 담채로 그려진 꽃그림도 에도시대(江戶時代) 전형적인 화훼화풍이 엿보여 원본의 표지까지 그대로 모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지도의 오른쪽 상단에 윤두서의 장손인 윤종(尹悰)의 수장인이 찍혀있다. 윤두서의 장남 윤덕희(尹德熙 1685-1766)가 쓴 「공재공행장(恭齋公行狀)」에는 윤두서의 지도제작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중국의 지도와 우리나라의 지리서는 모두 그 내용을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해서는 산천이 흐르는 추세와 도리(道里)의 멀고 가까움, 성곽의 요충지를 빠짐없이 자세히 파악했다.
"공은 그때 벌써 지도를 만들고 또 기록했으며, 지도상의 지점을 실제 다녀본 사람과 함께 책을 펴놓고 증험하면서 손바닥을 가리키듯 낱낱이 열거했다. 또 <일본여지>를 그렸는데, 역시 빠진 것 없이 아주 상세하다. 대개 공이 군사 분야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도리와 산천의 기록에 실제로 각장의 문자를 쓴 것이다."
이 기록은 윤두서가 우리나라의 지리를 자세히 파악하여 지도를 제작하였으며 군사 분야에 대한 관심이 일본지도의 제작으로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윤두서가 제작한 우리나라 지도란 녹우당에 소장된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보물 제481-3호)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문인화가와 화원화가들이 왕명을 받아 지도를 그린 사례는 조선초기부터 있었지만 문인화가가 개인적인 관심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지도를 모사한 사례는 윤두서가 가장 선구적이다.
윤두서의 외증손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강진 유배시절인 50세(1811년)에 쓴 편지에서 윤두서가 그린 일본지도를 언급하였다.
"공재께서 손수 베꼈던 일본지도 1부를 보면 그 나라는 동서로 5천리이고 남북으로는 통산 1천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도의 너비는 거의 1장에 이르는데 군현(郡縣)의 제도와 역참(驛站)의 도리(道里), 부속 도서들, 해안과 육지가 서로 떨어진 원근, 해로(海路)를 곧장 따라가는 첩경(捷徑) 등이 모두 정밀하고 상세하였습니다. 이는 반드시 임진년·정유년의 왜란 때에 왜인(倭人)들의 패전한 진터 사이에서 얻었을 것일 텐데, 비록 만금(萬金)을 주고 사고자 한들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1통을 옮겨 베껴놓았는데 일본의 형세가 손바닥을 보듯 환합니다."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도 1811년에야 일본지도를 처음으로 접했는데, 윤두서는 이 보다 100여년 앞서 일본지도를 구해서 모사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함께 숙연해진다. 윤두서처럼 일본에 관심을 가졌던 지식인들이 일찍부터 많이 나왔더라면 오늘날 독도영유권 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글 차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