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退溪集)
조선 중기 안동 출신 이황의 문집.
이황(李滉, 1501~1570)은 주자의 학문과 사상을 이은 도학자로서 이기호발설 등 성리학 관련 분야에서 고명한 탁견과 학문으로 매우 뛰어난 인물이다. 특히 이황이 당시 군왕인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성학에 대한 선학의 도(圖)와 설(說)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유학의 핵심을 10개의 도(圖)로써 정리한 것으로, 군주는 사단(四端)의 마음을 확충해 본성을 회복한 성인이 되는 학문인 성학을 돈독히 닦아 그것으로써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68세의 나이에 지은 것이다.
선조 대에 류희춘(柳希春)의 건의에 따라 정부에서 간행하려고 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그 뒤 문인 조목(趙穆) 등이 1599년(선조 32)에 간행하기 시작해 이황이 죽은 지 30년이 되는 이듬해인 1600년에 원집(原集) 49권, 별집(別集) 1권, 외집(外集) 1권 등 모두 51권 31책으로 간행하였다. 이것이 경자본(庚子本)으로 불리는 『퇴계문집』 초간본으로, 목판본이다.
이후에 문인 류성룡(柳成龍)이 『퇴계선생연보』 3권 및 부록 1권을 편찬해 경자본에 추가하였다. 1746년(영조 22) 6세손 이수연(李守淵)이 경자본에 수록되지 못한 유고를 수집해 『퇴계선생속집』 8권 4책을 편찬하였다. 1793년(정조 17)에는 권두경(權斗經)이 편찬한 『퇴계언행통록(退溪言行通錄)』 8권을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개정해 『퇴계선생언행록』 6권으로 간행하였다.
1869년(고종 6) 후손 이휘부(李彙溥)·이휘재(李彙載)·이만호(李晩浩)·이만각(李晩慤) 등과 유생 40여 명이 도산서원에 모여 중간본을 내되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체재를 따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당시 도산서원에 보관중인 책을 열람해 최초본인 『퇴도집(退陶集)』 20책, 중본(中本)인 『퇴계선생집』 40책, 경자본의 정본(定本)으로 간행할 때 대본이 되었던 『퇴계선생문집』 30책, 『퇴계선생수간(退溪先生手簡)』 2책, 『선생문집초본』 1책, 『문집초본』 1책, 『퇴계선생집습유』 12책 등 모두 105책을 초본과 대조해 불필요한 부분을 뺀 뒤 유생들에게 베껴 쓰게 하고, 이휘부가 더 수집한 유고를 합해 모두 97권 75책으로 편찬해 번남가숙(樊南家塾)에 수장하였다. 이것이 번남본(樊南本)으로 불리는 『도산전서(陶山全書)』로서 필사본이다. 원집 66권 49책, 외집 1권 1책, 별집 2권 2책, 속집 8권 6책, 유집(遺集) 20권 17책으로 구성되었으며, 내제는 ‘퇴계선생전서(退溪先生全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특히 유집의 경우에는 그 목록과 실제 수록된 내용이 다른 부분이 많고, 편찬 원칙을 밝힌 범례에는 부록에 「언행통록(言行通錄)」, 연보 등을 수록한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한편의 글도 수집되어 있지 않다. 또한, 시문에 중점을 두어 다른 저술은 소홀히 취급된 한계가 있다. 그 뒤 1910년 이후에 후손이 번남본을 대본으로 재정리하고 유집을 보충해 원집 66권 27책, 속집 8권 3책, 별집 1권 1책, 외집 1권 1책, 유집 20권 7책 등 모두 96권 39책으로 된 『도산전서』를 편찬해 도산서원의 상계(上溪) 광명실(光明室)에 보관했는데, 이것이 상계본(上溪本)이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때 몇 책이 없어졌다.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당육선공집 (唐陸宣公集)
당나라 육선(陸宣)이 지은 시문집. 육선은 당(唐)대의 정치가이자 문학가로 자는 경여(敬輿)이고 소주(蘇州) 가흥(嘉興) 사람이다. 770년 진사에 급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使) ․ 한림학사(翰林學士)등을 역임하였고 덕종(德宗) 연간에 소서(詔書)를 많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