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정(尹孝貞) 추증교지
1573년(선조6) 윤복(尹復)의 아버지 윤효정을 가선대부에 추증하면서 발급한 추증교지.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증직된 윤효정(尹孝貞)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함.
만력 1년 9월 29일
통정대부 수(守) 충청도관찰사 윤복(尹復)의 돌아가신 아버지로서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추증함.
어초은공(漁憔隱公) 윤효정(尹孝貞)
어초은공은 강진 덕정동에 거주하다가 해남으로 거처를 옮겨 임우리, 유희춘 등과 같이 금남 최부선생에게 수학하던중 생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초은공은 출사(出仕)를 하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호학적선(好學積善)하여 후학들을 교도(敎導)하니 문교(文敎)가 크게 천명되었고, 삼개옥문(三開獄門)의 덕(德)을 베풀었으며, 자손들이 중앙관직에 진출하면서 명실공히 호남명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어초은공은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 파조(派祖)이며, 처음으로 해남 백련동에 녹우당의 터전을 마련했고, 해남(海南) 윤씨(尹氏)의 본관(本貫)을 득한 득관조(得貫祖)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뿐만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씨의 기록은 있을뿐 현재와 같은 본관의 의미의 기록은 없다.
아래 사마방목을 보면 어초은공의 시권에는 본관의 기록이 없으나 자제분인 윤구의 시권에는 해남이라는 본관이 명시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과거시험의 시권에 신분확인을 위한 본관(本貫)과 사조(四祖)를 기록해야하는 사회적 상황이 있었다.
이에 본관의 필요성을 느낀 어초은공이 자제분의 과거시험 시권 기록을 위하여 본관을 부친 "경(耕)"이 거주지인 "강진(康津)"이 아닌 자신의 거주지인 "해남(海南)"을 본관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해남 윤씨 본관이 최초로 사용된 기록이다.
지리지에 처음 본관의 기록이 보인 것이 여지도서다.
[생원] 연산(燕山) 7년(150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4위(4/100) 윤효정
출처:
『홍치14년신유2월○일생원진사방(弘治十四年辛酉二月○日生員進士榜)』(사마방목(司馬榜目)[보물 제1464호])
[생원] 중종(中宗) 8년(151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2위(2/100) 윤구
출처 :
『정덕8년계유8월20일생원진사방(正德八年癸酉八月二十日生員進士榜)』(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驪州李氏玉山門中典籍)-사마방목(司馬榜目)[보물 제5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