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공 윤선도의 시문집이다.
1791년(정조 15) 전라감사 서유린(徐有隣)이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하였다. 그 뒤 정조 22년 전라감사 서정수(徐鼎修)가 윤선도의 본가에 간직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하여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 ≪고산유고≫이다.
이 책의 편목을 보면, 권1에는 오칠언(五七言)의 고시·율시·절구·회문(回文)·집고(集古) 등 250편이 실려 있고, 권2에는 <병진소 丙辰疏> 등 16편의 소(疏)가 실려 있다. 권3의 상권에는 <국시소 國是疏>·<논예소 論禮疏> 등 13편의 소와 <예설 禮說> 2편이 있고, 하권에는 <상친정서(上親庭書)>를 비롯한 17편의 서(書)가 있다.
권4에는 <답이현풍서 答李玄風書> 등 100편의 서가 수록되어 있다. 권5에서 <여갑산백서 與甲山伯書> 등 21편의 서는 상권에 있다. 하권에는 13편의 축문, <향사당조약 鄕社堂條約> 1편, 4편의 서(序), 2편의 설, 비명 5편, 잡저 5편, <산릉의 山陵議> 등 의(議) 12편, 잡록 3편, 기 2편이 실려 있다.
권6은 별집으로 상권에는 시 8편, 부(賦) 4편, 논 3편, 책(策) 6편, 표전(表箋) 4편이, 하권에는 ‘가사(歌辭)’라는 표제 아래 75수의 시조가 실려 있다.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琴詠>·<증반금 贈伴琴>·<초연곡 初筵曲>·<파연곡 罷宴曲>·<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어부사여음 漁父詞餘音>·<몽천요 夢天謠>·<견회요 遣懷謠>·<우후요 雨後謠> 등이 하권에 수록된 시조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가운데 중요한 자료로는 <병진소>·<국시소> 등 시정(時政)에 관한 상소문을 들 수 있다. <논례소(論禮疏)>·<예설> 등 예학에 관한 논의와 <산릉의> 등도 조선조의 정치사·사상사 및 당쟁에 관한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별집에 실려 있는 시조 또한 시가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병진소>는 1616년(광해군 8) 윤선도가 30세의 성균관 유생으로서 올린 글이다.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 옹립에 공을 세운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전횡과 이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 탄핵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그 내용이 광해군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당시의 권신들에 의하여 감추어진 채, 그 보복으로 그의 아버지 유기(惟幾)가 파직되고, 그는 이듬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견회요>와 <우후요>는 이때 지은 작품이다.
조선조 예학논쟁의 발단이 된 윤선도의 <논예소>는 그가 73세 되는 1660년(현종 1)에 씌어졌다. 그 전해에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 趙氏)의 복(服)을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서인(西人)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의견을 좇아 기년(朞年 : 1년상으로 복을 입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에 남인인 윤선도는 허목(許穆)·윤휴(尹鑴) 등과 함께 이에 반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였다. 송시열 등은 효종이 둘째 왕자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들어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 : 왕위의 계승이 윤리적 질서로는 정당하나 혈통상으로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설)에 해당하므로 기년복이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선도는 종통(宗統)의 정당함을 내세워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세자였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은 뒤 부왕 생전에 효종이 다시 세자로 책립되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둘째 왕자라고는 하지만, 적장자(嫡長子)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왕위에 오른 현종이 기년설을 따랐으므로 남인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논예소>는 불살라지고,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당하였다.
<국시소>는 윤선도가 71세 때인 1658년(효종 9) 동부승지로 있을 때 올린 글이다. 이 글에서는 본래 서인이었다가 남인이 된 정개청(鄭介淸)의 서원을 철폐하고자 하는 송시열 등 서인의 의도가 부당함을 지적하였으나, 오히려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산릉의>는 72세 때인 1659년 효종이 죽은 직후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요청에 의하여 산릉(山陵)을 살펴 그 적부를 논한 글이다.
본래 효종의 산릉은 수원(水原)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일부에서 건원릉(健元陵)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는 의론이 돌아 그 적부를 윤선도에게 판별하도록 하였다. 윤선도는 수원에 쓸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인들의 반대로 묵살되고 건원릉 자리로 결정되었다.
<산중신곡>·<산중속신곡> 등은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좇는 것)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에서 2년간의 유배를 마친 뒤, 고향인 전라도 해남의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당시 지은 작품이다.
이후 윤선도는 예송(禮訟) 후의 유배지로부터 1667년(현종 8) 풀려나게 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 당시 발견하였던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 들어가 낙서재(樂書齋)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때에 지은 것이 만년의 절창 <어부사시사>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하였던 윤선도는 벼슬길에서 벗어나 짐짓 어부의 생활을 하였고, 그 결과로 남겨진 많은 작품이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당시의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긴요하지만, 특히 조선조 사대부 층의 자연관을 이해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조선조의 강호문학은 이현보(李賢輔)와 송순(宋純)에서 정립되었고, 윤선도에 이르러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73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하여 간행한 ≪이조명현집(李朝名賢集)≫ 3에 수록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11~2015년에 이상헌 등이 고산유고를 완역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33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