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공이 간척지를 위하여 쌓은 원둑. 1991년 사진
진도 굴포리 간척지는 대한민국 민간간척지 1호로 알려져 있다.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서 매년 정월 보름 이곳 주민들이 고산공 윤선도에게 감사의 동제를 올리는 제당.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350년전 고산 윤선도 선생이 간척사업을 하기 위하여 굴포부락에 임시 주거하면서 원뚝을 몇 번이나 막았으나 허물어지므로 당(堂)에 크게 공을 드리던 뒷날 지금의 원뚝터전에 하얀 안개가 끼어있어 이 곳을 막았더니 오늘날까지 안전하게 이르고 있다.
고산공이 이곳에 원둑(제방)을 쌓으면서 생긴 일화(전설)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산공은 이곳에 제방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때마다 무너지고 쌓으면 또다시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로 인해 깊은 시름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제방을 쌓고 있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가고 있는 꿈을 꾸게 되었다.
고산공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새벽녘 사립문을 열고 나가 제방을 쌓는 곳을 보니 꿈에 보았던 구렁이가 기어가던 자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고산은 이를 이상히 생각하고 구렁이가 지나간 자리에 제방을 쌓으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여 그곳에 뱀의 지나간 형상대로 석축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둑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곳의 지형이나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쌓은 결과 무너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산공은 2백정보 되는 간척지를 논으로 만들어 이곳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도록 해주셨다. 이에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고산공에게 감사를 드리고 원뚝이 무탈하여 풍년을 되기를 기원하기 위하여 고산공의 신위로 당제를 지낸다.
1986년 음 4월 18일 신당을 재건하고, 신당유적비와 장승을 세우다. 또한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孤山尹公善道 先生 史蹟碑)는 굴포, 신동, 남선, 백동 주민 일동이 1991년 4월 6일 건립한 것이다.
현 굴포 방조제는 구역 면적 59㏊, 간척 면적 51.2㏊, 높이 2.8m, 길이 294m이다. 고산 선생이 막은 원뚝을 1946년 보강한 것이 지금의 18번 국도가 지나는 방조제다.
고산 선생이 진도에 귀양 와 있던 이경여(李敬輿)에게 ‘和李政丞 三首(화이정승 삼수)’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때가 병술년(1646)으로 고산 선생도 그시기에 진도에 머물며 간척을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屈浦마을 堂祭祀祝文>
1986년 4월 17일 당 개수시에 작성한 축문
別神祭祝
維
歲次 丙寅 四月 癸丑 朔 十七日己巳
臨谁面屈浦里
男女老少
沐浴帝戒
乾坤定位 有民有神
民在於地 神在於天
神德於矣 人賴以生
人誠格矣 神飲無憾
天荒地老 除陽失和
比兵以餓 人多橫死
死不得所 乃作無祝
神之無祝 爲癘爲疫
禍人害畜 輒求性뇌
村村家家 人設癘祭
謹以淸酌 脯艦祗薦
于神奠献 尚
饗
당제 순서 : 독축, 헌잔배, 소지・분축(焚祝), 음복, 헌식, 철상
우여곡절도 있었다. 지난 1999년 삼별초 지휘관인 배중손 장군을 기린다며 지역 유지들이 기존의 당집을 허물고 같은 장소에 배중손 사당을 짓고 동상을 세워 불편한 동거를 해왔으며 마을 주민들과 해남윤씨 종친회 등이 역사 왜곡이라며 반발, 소송까지 진행해 법원 조정을 통해 2003년 배중손 사당 이전에 합의했다.
2003년 7월 15일, 광주지법 해남지원에서 원고 윤선도와 피고 배중손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조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현 배중손의 사당을 별도의 장소에 이설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고산 윤선도선생, 배중손장군, 삼별초군 세 위패를 봉안한다.
2, 굴포 사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도록 진도군에서 적극 노력한다.
3, 굴포리 마을사람에게 정월 대보름 당제(堂祭)에 제찬대(祭餐代)로 200만원을 계속 지원한다.
이후 이전이 진행되지 않다가 전남도와 진도군이 예산 5억 원을 마련해 18년이 흐른 2021년 배중손 사당이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됐고 비로소 고산 사당이 제 모습을 찾게 됐다.
고산공 윤선도께서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머무셨던 집터(굴포리 102번지, 굴포길 26)
고산공 14대손 윤의식이 2018년 10월에 집터 앞에 표지석을 세우다.